아주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이름 없는 남자의 손은 흉터 투성이었다.
죽음과 아픔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거친 손은 희고 말랑한 소녀의 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손이었다. 붕대로 잔뜩 휘감긴 손에는 가끔 고통이 물든 것처럼 검은 얼룩이 져 있거나, 또 가끔은 새로운 상처가 덧그려져 있었다. 손뿐만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 곳곳이 그랬다.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도 그렇겠지. 나무는 나이테를 새겨 흘려낸 시간을 증명한다는데 남자는 나이테 대신 흉터를 새겨 오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감싼 붕대 위로 피가 배어나와 있는 걸 본 소녀가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또 다쳤어?
물론 올려다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있으면 더 놀랐겠지. 사실 특별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던 질문도 아니었다. 소녀가 아는 남자는 대개 그러했으므로. 너무하네, 아무리 근무라고 해도 그렇지. 사람을 뭐 이렇게 굴리고 그런담, 부루퉁한 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소녀는 현명하게도 그 발언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제 손을 내밀었다. 손, 줘. 잔뜩 언짢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남자가 별다른 저지 없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주변 의자에 끌어 앉힌 소녀가 매고 있던 가방에서 연고며 붕대들을 한 뭉텅이 꺼내놓았다. 맑은 물까지 옆에다 떠놓고는 조물조물 상처를 감싼 붕대를 풀어낸다. 너무 많이는 아니고, 그냥 딱 상처를 볼 수 있을 정도까지만.
사실 다 풀어낸다고 해도 아주 혼나지는 않을 걸 알았지만, 그건 어떤 의미로는 소녀가 남자를 대할 때에 있어 스스로 그어 놓은 선쯤 되었다. 찾아가는 길이라면 모래바람마저도 달가웠고 무엇이건 선뜻 내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기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고민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머릿속을 점령하는 것들. 어디에서 시작하건 그 생각들이 종착하는 곳은 같았다. 이주 근본적인 문제였다. 어디까지 다가서야 하고, 어디에서 선을 그어야 하는가. 소녀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때문에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상냥한 세계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잘 알았다.
타국의 사람, 그냥 평민도 아니고 왕의 총애를 받는 책사. 그건 때로 단순한 신분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아마도 전쟁이 일어나면 소녀는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남자가 그 칼 끝에 소녀를 겨누라 명 받을 지도 모른다는 것도 두 사람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두 사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조차도. 그러나 소녀도 남자도 굳이 그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따지자면 그건 암묵적인 침묵에 가까웠다. 지금 눈 앞 보이는 모든 것이 핏빛으로 물들 수 있다는, 그 잔인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 작은 세상은 거대한 체스판과 같았다. 그 위에 오른 말들이 움직일 때, 남자와 소녀는 절대로 같은 곳에 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이 안온한 평화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두 사람 중 누구의 의사와도 관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조금 슬프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소녀는 때로 자신이 푸른 나라의 책사도 무엇도 아닌 그냥 소녀이기를 바랐고, 그것보다 더 자주 남자가 그 손에 죽음을 얹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언제까지고 불가능한 바람임을 잘 알았다. 사막의 바람에 모래먼지가 섞여들고 산을 감싼 푸른 안개가 자욱한 것처럼, 남자의 칼끝에는 변함없이 죄가 묻어날테고 제 신분이 바뀔 날 역시 없을 것이다.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것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날이, 한 순간 순간들이 어느 날의 미래에 뼈저린 슬픔이 될 것 역시도.
그러나 지금 이 시간이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제 자신을 겨눌지라도.
언제나 몇 번이라도, 꼭 같이 행동할 자신 역시도 소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슬픔도 고민도 잠시 밀어둔 채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로 했다. 뭐야, 이게~ 완전 많이 다쳤잖아. 눈꼬리가 축 늘어졌다가도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상처에 집중한다. 새로 난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느렸다. 혹여 제 손이 아주 작은 아픔이라도 더할까봐서. 다치지 마. 진짜, 안 아팠으면 좋겠어. 그런 말들이 하나도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에 바람을 실어 꾹꾹 눌러 담았다. 상처를 수습하고 꼼꼼하게 붕대를 도로 매어준 뒤에도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상처 안 덧나게 조심하구, 물 닿으면 안 되구...., 음, 또 뭐 있지... 곰곰 생각하다가, 문득 소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수많은 바람 가운데에 소리 없이 하나를 더 끼워넣는다. 닿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두근거리는. 말간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아직 놓지 않은 손을 붙들고 잠깐 눈을 감았다. 입 속으로, 들리지 않게 기원을 중얼거렸다.
아주 언젠가는, 네 손 위에 죽음 대신 생명을 올릴 수 있기를. 하고
그런 날들이 있었다.
아주 언젠가의 옛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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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리지널에서는 도진이가 다쳐오는 연이를 혼냇다......
꿈꿨던 거 생각나서 전생 날조 겸사 친구 덕질..... 캐붕잇으면죄송합니다 죽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