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단] Sonnet
00.
정 단이 책임이라는 것의 무게를 처음 실감한 것은 지금보다도 아주 어리고 작을 때의 일로, 대개 문 밖으로 들려오는 다툼을 들을 때였다.
단의 부모는 한 때 서로를 사랑했다. 그로 인해 태어난 것이 정 단이었으니 그들이 언젠가 서로를 열렬하게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틀린 바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닮아있었고, 어렸고, 아름다웠고, 세상에서 오직 서로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처음 눈이 마주치자마자 운명마냥 사랑에 빠져들었던. 그렇게 사랑에 빠져들어, 계절이 한 바퀴 돌기도 전 두 사람은 결혼했다. 온통 피어난 꽃들로 가득한 정원에서 열린 결혼식이었다. 여름날 만개한 꽃들 사이로 걸어나가던 연인은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두 사람을 꼭 닮은 아이가 태어나던 날은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찬란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닮아있었고, 그것은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서 흥미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마저도 다르지 않았다.
행복의 증거라 믿었던 아이가 짐덩어리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짐덩어리는 이내 둘 중 하나가 책임져야 할 귀찮은 무언가가 되었고, 그 책임의 향방이 결정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건 딱 두 사람이 함께했던 삶의 무게만큼의 책임이었고 동시에 짐덩어리가 가진 미래의 무게만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싸움이 끝나던 날 비 냄새가 나는 런던의 공항에서, 더이상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게 된 여자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아이가 기억하는 마지막 어머니의 목소리로.
Farewell, Daniel.
그리고 열세시간의 비행이 끝났을 때, 아이는 다니엘이 아닌 단이 되었다.
또래에 비해 한참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남자는 아이를 데려왔으나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머니는 늘 용돈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 이외에 남자가 아이에게 베푼 것은 절대적인 방치뿐이었다. 두 사람이 사는 집은 대개 고요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올게요. 던져진 말들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사실 남자가 그 집 안에서 머문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이가 기억하는 집은, 대개, 제 소리 이외에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때문에 아이는 제 나름의 방식대로 그 텅 빈 고요를 채워가려 시도했다. 처음에는 작은 동물이었다. 학교 앞에서 파는 노란 병아리, 마트에서 파는 햄스터, 문구점에서 팔았던 토끼 같은 것들로. 그리고 흔한 결말로, 그것들은 자주 아팠고 금세 싸늘하게 사그라들었다. 작은 온기가 꼬물거리며 제 옆을 채울 때마다 아이는 아주 조금 달가워졌고 이내 그것보다 훨씬 더 서글퍼졌다.
몇 번이고 울고 나서, 아이는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을 자라나 어른이 되었다.
01.
2월 29일.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글자는 명료하게 빛나고 있었다.
색색깔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단은 생각한다. 처음 머리를 울려오던 그 목소리를 들었던 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더라, 아니면 그 지긋지긋한 꿈을 꾸기 시작했던 때는? 아니,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날로부터는 도대체 얼마가 지난거지? 눈 앞은 선명하게 물들어있는데도 머리 속은 안개라도 낀 것마냥 멍하고 희뿌옇기만 했다. 핸드폰의 비밀번호를 두드려 메모란을 열었다. 꽤 오랜 기간 적어놓은 메모들이 가지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맨 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모아놓은 쪽지의 내용이다. 그리고 과비, 휴학신청, 연이 과외, 해피쿠킹타임 레시피 번역 목록….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들을 한참 스쳐 내려가면, 맨 밑을 차지하고 있는 메모가 있다. 메모의 내용은 간결하다. 정 명, 010. XXXX. XXXX. 적혀있는 열한자리의 숫자를 톡톡 두드리다 눈을 감았다. 연락을 해야 할까. 손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인데도 고작 정보 몇 개를 나눈 사이보다 멀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문득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본다. 제각각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가슴을 채우는 것은 기묘한 동질감, 혹은 그것만큼이나 묘한 친근감. 얄팍한 신뢰 위에 쌓아올려진 관계임을 알고 있음에도 쉽게 안도하고, 기대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쁘지 않은 일상이라 믿고.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바라고.
사실 그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02.
싸늘한 몸에 소스라치면서도 이내 그것이 제가 아는 사람 아니라 안도하는 자신이 있다.
문득 그런 자신을 깨달아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먹은 것이 없는데도 한참 신물을 게워냈다.
그리고, 조금, 울었던 것도 같아.
03.
숨을 내쉬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루 사이 익숙해진 담배의 끝맛이 입 안에 가득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제 위에는 숨결이 남아 있었다. 죽어버린 이들의 숨이다. 제가 밟고 올라선 숨. 고무줄을 하던 여자 아이, 늙은 노파, 벽 뒤에 숨어있던 어린 아이…. 합리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할 수조차 없었다. 꿈결이니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중앙 섬 석상 곁에 누워있는 사람들도 꿈인가? 조심히 다녀올게. 인사하자. 전날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마주 대었던 손은 분명 따뜻하게 온기가 돌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며, 자신은 어디쯤에 서있는 걸까? 멍한 머리 속, 메운 생각들은 온통 참담한 것뿐이다.
쥔 총의 무게가 지나치게 가벼웠다. 문득 그 총구를 제 머리로 가져다 대었던 단이 이내 그것을 도로 거두었다. 책임, 책임. 총의 무게가 가벼웠을지언정 제가 끌어안은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올려둔 여섯개의 체스말을 바라보다 단이 눈을 감아버렸다. 그들이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며, 그들이 망가지지 않게 보호하며, 그들이 부서진다 할지라도 다시 일으키리라.
그들의 가호가, 언제나 당신과 함께.
들려왔던 목소리가 뼈저렸다. 모든 게 지나치게 무거웠다. 잊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마지막 연기를 뱉어낸다. 가득 차있던 담뱃갑은 어느 새 텅 비어있었다.
04.
그것은 정 단에게 있어 지나치게 잔인했으나 동시에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니 단은 아마도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게 된다면,
아마도.
침묵만이 남아있겠지.
천천히 다리 너머로 발을 옮긴다. 발 밑으로 하늘이, 바다가 일렁거린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Tired with all these, from these would I 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