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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단] 양들의 침묵

별띠첼 2016. 3. 8. 03:56





 

 "…야, 서상아."

 "뭐."


 다음에, 아니, 곧 보자.

 마지막으로 던지고 나온 것은 거의 충동에 가까운 말임과 동시에,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아는 모든 일들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제 자신이 견뎌내야만 할 모든 일들에 대한 선전포고. 온통 새까맣게 물들어 흐려졌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눈으로, 서상아는 정 단에게 부탁했다. 그 사람 죽는 것 지켜봐 줄 수 있어? 그리고 그 부탁은 단에게 있어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 치사한 새끼. 부탁을 듣는 순간 입 안에서 욕설이 맴돌았다. 목 끝까지 울컥 치밀어오른 것을 단은 간신히 제 속으로 갈무리해 밀어넣었다.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이상 수현의 죽음은 서상아의 그것과도 아주 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서상아가 방금 뱉은 그 부탁은, 단은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아니,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알고 있으나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애써 눈 감으려 했던 사실이었다. 이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정 단과 서상아의, 혹은 히어로와 캣니스의. 어떤 결말이 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둘 중 하나만 남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 스러지겠지. 그리고 어느 쪽이 되건 지켜야 할 약속은. 생각이 닿으면 이내 씁쓸해진다. 문득 목을 조여오는 참담한 기분에, 단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양의 울음소리는 그쳤는가? 뭐, 그런 얘기지.'


 그 밤 들었던 것은 흡사 예언이었다.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로 들었던 말이 끝의 끝에 와서야 날카롭게 가슴 속을 난도질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온 양이 이제는 제 멋대로 몸을 돌려 낭떠러지로 향한다. 천 길 아래, 바닥조차 알 수 없는 무저갱이다.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나뉜 색은 다섯이고 마련된 왕좌는 단 하나였으므로. 그러니 이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다른 색으로 물들었기에 처음 마주치던 그 시작부터 파멸 이외에는 남지 않을 관계. 그러므로 단은 알고 있다. 자신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양을 바라보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겠지. 이럴 줄 알고 있었던 일이고,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졌고, 시선을 두었으며, 어느 순간 마음까지도 두게 되었기에. 

 마지막 기도 정도는 너도 받아가.

 마음 준 것을 전부 품지 못할 지언정그것이 아마도 단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스탈링이 아니야. 한 마리쯤은 지킬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한 마리는 네가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찾아오는 것은 고통이다. 물론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흘러갈 수 없음을 단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오했던 것들이 왜 이제와서야 뼈저리게 아픈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단은 먼저 문을 넘어 밖으로 나섰다. 마음 한 구석, 답을 알 수 없는 공허한 물음들이 맴돌았다. 물음의 끝에 맞닿은 것은 후회다.  

 처음부터 아무도 들여놓지 않았어야만 했다,고 단은 제 자신에게 속삭였다. 속삭임은 곧 소리 없는 흐느낌이 되어 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어둠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나, 둘, 셋. 몇 번이고 눈을 깜박여도 가슴 속에 먹먹하게 잠긴 것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흐리게 물든 시야가 몇 번이고 세상을 번지게 하다 도로 또렷해질 즈음이 되어서야, 따가운 눈가를 문질러 닦아낸 단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하늘과 바다 위로 펼쳐진 다리를 따라 걷는다. 걷다 보면 끝이 보일지도 모르지. 언젠가 궁금하다 말했던 바다의 끝, 혹은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말했던 하늘의 끝, 어쩌면 처음 만났던 이 모든 꿈의 끝. 그것도 아니라면….

 제 기억 위로 무너져내릴, 붉게 물든 어둠의 끝.



 아주 천천히 단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눈 앞에는 어느 새 흰 돛이 달린 작은 조각배가 물결을 탄 채 흔들리고 있었다. 

 엉성하게 걸린 붉은 깃발에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 자 언제든지 내 나라로 망명하라. 

 단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가 싶더니 이내 발을 옮겨 조각배에 몸을 싣는다.  

 그 아름답고 작은, 히비스커스 가득한 나라의 마지막을 기억하기 위하여.  









 *

 

 관록으로 써야지 했던 얘기 많았는데 머리가 비어서 생각나는게 저거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거 갠록인거같은데 관록아니고(ㅋㅋ 망했다 여튼 상아 많이 예뻐해요... 저 전지적상아맘시점이니까요.. 님 상아복지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