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단] 약속
눈을 떴을 때 단이 마주한 것은 병원 특유의 약냄새와 흰 천장이었다. 머리 속으로 쨍한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와 아직 멍한 정신을 흔들었다. 오빠, 오빠. 괜찮아? 아주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연의 목소리였다. 느리게 시선을 돌리자 걱정 가득 담긴 눈초리가 자신을 맞았다. 놀랍게도 여전히 자신은 살아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지도 먹지도 못한 탓에 얼굴은 핼쓱해졌고 영양실조는 덤이었지만 어쨌거나 살아있었다. 연의 부름에 다녀간 의사는 한참이나 잔소리를 했고, 연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는 하냐며 그 옆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연을 다독이며 그제서야 단은 조금 인정했다. 아, 여기가 현실이기는 하구나. 하고.
그 이후로도 며칠이 지났고, 흘러간 시간만큼 단은 차차 안정되어갔다. 그리고 제가 깨어난 이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깨어났던 순간과 병원에서 다시 눈을 떴을 사이는 왠지 모르게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그걸 도로 기억해내는 데는 아주 오래 걸렸다. 그마저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아, 아팠었지. 힘들었었지. 하는 것이 전부였다. 연에게 물어보았지만 연마저도 그저 제가 쓰러져 있었다 말할 뿐이었다. 아마 골방에 틀어박혀 있다 영양실조가 온 탓에 기절이라도 한 거겠지,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이후 제 반응이 그다지 '정상인'의 것이 아님은 단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반응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애시당초 정상인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던가. 모든 것이 한참 동안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 돌아갔으니 자신도 조금쯤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기묘한 합리화였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러나 애써 인정했던 그 현실의 경계는 지나치도록 쉽게 도로 무너져내렸다.
며칠이 지난 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여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 순간이었다. 손을 뻗어 알림을 확인한 단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매일같이 들어가던 방송 사이트의 쪽지였다. 유일하게 챙겨보던 방송의 BJ. 단 역시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비록 내용 없이 제목뿐인 쪽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발신자가 전달하려는 바는 충분했다. 발신자, 해피쿠킹타임. 그리고 제목은….
[매운탕]
남들이 보면 어이없다 웃을 법한 제목이었으나 단은 웃지 못했다. 한동안 빤히 화면을 바라보던 단이 손가락을 움직여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화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질수록 꿈과 현실 사이가 또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약속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것 역시도, 단은 잘 알고 있었다. 기억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볼까요? 잠시 망설이던 손끝이 이내 화면을 두드려 몇 글자를 더 만들어 냈다. 더해진 것은 고작 네 글자였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글자 수 이상이었다. 해피쿠킹타임으로는 한 번도 드러내놓은 적 없던 이름. 동시에 자신 역시도 기억하고 있다는 신호.
'현시한씨.'
2월 말이라고는 해도 아직 추위는 온전히 가신 것이 아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최근까지 환자였던 탓에 목도리며 코트며 바리바리 껴입은 단이 명동역 출구로 나섰다. 두리번거리며 찾을 새도 없이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지난 며칠 간 질리도록 봤던, 아차. 며칠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지만. 뭐 어쨌거나 체감상 10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으니 며칠이라 표현해도 좋을 터였다. 어쨌거나 그런 사람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역시나 저 쪽도 알아본 거겠지. 타박타박 발을 옮겨 다가가, 아주 조금 시선을 올려 바라본다.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보이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얼굴. 아, 맞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지. 당연하게 받아들이다가도 흠칫 놀란다.
"오랜만이네요~, 아니, 원래대로라면 첫 만남인가?"
말을 걸어온 것은 시한이 먼저였다. 인사에 겨우 끄덕이며 답한 단이 말없이 종종걸음을 쳐 앞서 걸었다.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할 말이 많았기 때문에 가까웠으나, 어쨌거나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단이 안내한 곳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매운탕집이었다. 자리에 앉아 주문하고, 시한의 앞자리에 식기를 놓아주고, 거기에 제 몫으로 따른 물까지 한 잔 마시고 나서야 단은 입술을 열었다. 나름 맛집이라고 많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던데…. 그렇게 맵지도 않다니까 드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 쪽으로 정했어요. 그리고는 또 잠시 침묵. 얼마즈음이 흐르고 난 후에서야 단이 시선을 들어 시한의 눈을 마주했다. 영국에서 바로 오신 거에요? 물음에 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 역시 잘 알고 있는, 태연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다. 바로 비행기 끊어서 왔어요. 정단씨는요?
"잘 지냈어요?"
그리고 그 질문에 단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어땠더라? 사실 쉽게 말하기가 더 어려운 문제라서, 그냥 난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뭐, 그렇네요. 아하하…. 그런 단을 바라보던 시한이 태연한 얼굴로 돌직구를 던졌다. 정단씨, 얼굴 상했는데요.
"…에."
그 정도로 티나요? 묻는 말에 돌아온 것은 매우 강한 긍정이었다. 아하, 아하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시선이 방황했다. 때마침 주문했던 매운탕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또 그대로 한참 어색한 침묵이 이어질 뻔 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매콤한 냄새가 코끝에 맴돌자 간만에 먹는 병원 바깥 음식인 탓에 모처럼 식욕이 돋았다. 먼저 드세요. 한 그릇 떠서 먼저 내어준 단이 제 것도 떠서 옆에 두었다. 한 숟갈 크게 입에 떠서 넣고는 헉, 맛있어. 익숙한 MSG의 맛에 혀끝이 먼저 반응했다. 시한은 여전히 조금 매운지 깨작거리고 있었지만.
그 모습에 단이 문득 웃었다. 웃음소리에 시선이 마주쳤다.
그제서야,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