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LOGS

[아델] 휴식

별띠첼 2016. 4. 23. 16:56




 유난히 힘들었던 학기였다. 아델이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는 해도 22년간 쌓여있던 현대의학의 진보는 그녀로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양이었다. 덕분에 다시 잡은 전공책에는 아는 것만큼이나 모르는 것들이 많았고, 그것들 중 어느 하나 놓을 수 없어서 아델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밤을 새워가며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 고로 거진 1주일즈음 밤을 샌 마지막 시험이 끝나자마자 아델은, 녹초가 된 채 집 안으로 처박혀 거의 이틀을 꼬박 잠들었다. 


 거의 48시간을 꽉 채웠던 혼곤한 잠에서 아델이 깨어난 건 어딘가로 갈 준비를 다 마쳐놓은 로건 탓이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것마저 막고 깨우는 탓에 겨우 눈을 뜨자마자 욕실로 밀어넣어졌다. 제가 잠인지 잠이 자신인지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준비를 한 아델이 캠핑카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기실 반강제적인 외출이었다. 아, 더 자고 싶은데,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그래봤자 자신이 로건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으므로 -그건 그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델은 뭐라 토를 다는 대신 얌전히 조수석에서 눈을 감는 길을 선택했다.



 얼마나 잤을까? 한결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캠핑카는 어느 한적한 호숫가에 멈춰있었다. 따갑게 눈을 찔러오는 햇살에 몇 번 눈을 부빈 아델이 차 밖으로 내려섰다. 이내 눈 안으로 들어온 것은 눈부신 햇살만큼이나 예쁜 풍경이었다. 집과 도서관, 학교를 반복했던 아델로서는 제법 오랜만에 보는 것들이었다. 여름날의 햇살이 내리비치면 호수의 수면이 반짝거린다.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파문이 수면을 일그러뜨렸다. 작은 새들이 지저귀다가 이내 하늘로 날아오르고, 어디선가 오래되고 한적한, 작고 어여쁜 성당의 종소리라도 들릴 것만 같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평화였다. 발을 내딛자 나는 풀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마저도 그랬다. 아, 기분 좋아. 아델이 멍하니 생각했다. 책 냄새 가득한 도서관의 것이나 잔뜩 오염된 도시의 것이 아닌, 오랜만에 들이마시는 신선한 공기였다.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아델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닿은 것은 호숫가에 앉아있던 로건이다. 낚시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 앞에 낚싯대를 걸어둔 채 한참 집중하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로건이 씩 웃었다. 나름 회심의 선택이라고 어필이라도 하는 건지 의기양양한 그 미소에 아델은 그저 마주 웃어주었다. 솔직히 제법 마음에 든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활자와 화학물질들에 넌더리가 나던 차였다. 머리와 몸이 열렬하게 환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나름대로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싶어 여기에 데려온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휴식을 만끽하는 것도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낚싯대와 사투를 벌이는 로건을 뒤로 하고 의자에 걸터앉은 아델이 테이블 위로 손때가 묻은 노트를 펼쳤다. 군데군데 색이 바랜 노트에는 상당한 양의 글이 적혀 있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천천히 기록해왔던 것들은 대체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그 수많은 날들 사이에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건져낸 것들. 남들이 보면 시답잖은 장르 소설 아니냐며 비웃을 법한 내용이었으나 기실 그녀에게는, 그리고 그녀 곁에 있는 저 남자에게는 인생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억들이었다. 서기 2017년에 세상이 멸망했고 그 이야기가 담은 거짓말들은 2018년의 한국을 거쳐 진실과 함께 2040년의 세상이 되었다. 그 끔찍했던 영겁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아델은 제가 구현해낸 이들의 입을 빌려 담담하게 써내렸다. 글 안에서 어느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누군가는 절망했으며, 누군가는 의문을 품었고, 그러다 그들은 진실을 발견하거나, 혹은 그러지조차 못한 채 침잠했다.


 그 모든 굴레가 반복되던 마지막 어느 순간까지도 그러했다.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그 안에 박제된 채 의미없이 움직였을 터다. 그러나 그 마지막의 어느 순간 수많은 것이 뒤바뀌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지나치게 많았고, 그 가운데는 아마도. 흘끗 움직인 시선이 여전히 낚시에 정신이 팔린 로건을 향하는가 싶더니 어느 새 곱게 휘어졌다.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들이라고 예상했을 리 없지. 뭐,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그들에게 제대로 엿을 먹였으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조소하며 아델은 노트를 팔락거렸다. 노트의 가장 앞 장에는 이 모든 내용이 엮일 제목이 기록되어 있었다.  Silent Era : The time we lost. 글을 쓰기 시작했던 처음부터 정해놓은 제목이었다. 

 쓰여진 글자를 더듬는 손끝이 느릿하고 또 단단했다. 
 그녀가, 혹은 그가 겪어왔던 그 모든 시간만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