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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안] 균열

별띠첼 2016. 6. 4. 19:59

*일부 타 로그에서의 인용이 있습니다. 





 00.


 침대 위에 놓여있던 편지를, 기사를 조심스럽게 갈무리해 넣었다. 우선 다른 이에게 보여서는 안될 것임을 알고 있기에 한 행동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 속에서 글자들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가문과 가문 사이를 넘나들던 소문들, 이야기들, 쉽게 전해지고 부풀려지던 말들. 익히 알고 있던 것들과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의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느낀 것은 괴로움보다는 닥칠 것이 이제서야 닥쳐왔다는 예감에 가까웠다. 담담하다 생각했으나 손이 떨리는 것을 보면 또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지.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망토 안에 편지를 쑤셔 넣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문득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득한 피로함이 눈을 가렸다.


 어렸을 적부터 학습해온 머글에 대한 혐오는 이제 거의 본능적인 것에 가깝게 자라나 있었다. 어릴 적의 내 주변에는 그것이 틀렸다고 말해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난 나에게 있어 혐오와 거부는 진리와 같은 것이었다. 네가 옳은 거야. 너 외에는 옳지 않아. 장차 가문을 이끌어 갈 사람이라는 이유로 엄격한 틀 안에서 자라난 나는 정말로 그 작은 세상이 나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옳아, 너희는 틀렸단 말야. 아직도 저 안쪽 어딘가에서는 어린 날의 내가 치기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러면 지금의 내가 그 옆에서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아냐, 넌 틀렸어. 율리안.


 그리고 알면서도 그 본능을 부정하지 못하는 건, 솔직히 꽤 비참한 일이다. 




 01.


 균열은 모여서 거미줄같은 금이 되고. 

 이내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이 된다. 




 02


 그리고, 또다시 밤이었다.

 머리 셋 달린 거대한 개를 만나고 나서부터 생긴 미세한 균열은 천천히 나를 갉아먹어 가고 있었다. 세 번째의 삶이었다. 다시 돌이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돌아오고 어떻게든 무사히 넘겼는데도 그 날의 환상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처음에는 미세한 통증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이내 불이 붙듯 번져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감각으로 변질되었다. 닿아오던 발톱의 감각, 무력하게 찢겨나가던 피부와, 채울 수 없는 시야의 공허함. 문득 또다시 왼쪽 시야에 어둠이 들어차는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아니, 아니.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 아픔에 휘둘릴 수는 없다. 나는 돌아왔고, 누군가의 그 빌어먹을 희생이 나를 이 자리까지 데려다 놓았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눌러대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익숙한 아픔이 정신을 두드리고 나서야 몇 번째인지 모를 환상은 제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툭,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채운다.

 물었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03. 


 나를 좀먹는 사람들과 똑같아. 

 네 생각이, 행동이. 그렇게 만들거야. 




 04. 


 창백하게 질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밀려오는 구토감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뒤로 물러섰다. 시선이 마주쳤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는 먼저 그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내 이름을 불러오는 네게 다음에, 라는 말로 포장하고는 나는 그만 먼저 몸을 돌렸다. 잘 알고 있는 끝이었다. 애써 포장하기는 했으나 이 '다음'은, 정말로 오지 않을 다음이었다. 아마도 나는 영원히 너와 대화하지 못하리라.

 이 다음에 너와 나눌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그 좀먹는 사람들과 똑같은 말과 행동으로 너에게 또다시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그대로 나를 향해 돌아와, 더욱이 깊은 혐오만을 나에게 남기겠지.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갈라서게 될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내 문제였다.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쳐나가지는 못할 것이기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을 뒤바꿀 자신이 나에게는 없었다. 이렇게 살아오는 것이 나에게는 정답이었고 그 외의 길은 모조리 틀린 길이었다. 뼛 속 깊숙히, 심장 저변까지 파고든 본능이 속삭인다. 이걸로 충분해, 지금까지 그렇게 잘 걸어왔잖아. 충분히 사랑받았으며, 완벽하게 군림했고, 그 이상 바랄 수 없으리만큼 만족스러운 길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이제서야 눈을 뜨고 내 앞을 확인한다.

 그 길의 끝에는 검은 짐승이 입을 벌리고 서 있다.  


 너는 틀렸어, 작은 율리안.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작은 어린아이는 이제 귀를 틀어막았다. 




 05. 


 그리고 나는 지극히 틀린 그 길을 걸어, 

 마침내 그 검은 짐승의 입 속으로 내 머리를 밀어 넣게 될 것이다. 


 "…나이젤. 묻고 싶은 게 있어."


 짐승이, 비죽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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