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무섭지는 않았어?"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그 말에 연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속에 감춘 말이 많았다.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이라도 반드시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대개 그런 상황은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서 만들어진다. 선 연은 그런 것이 어느 때인지 잘 알았다. 그건 예를 들자면 떠올리기조차 싫은 어느 날들의 일들과 같은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속이 메스껍게 물드는. 미술 준비실로 옮기는 걸음이 무거웠다. 반드시 해야만 할까? 내가, 꼭, 해야만 할까? 도진과의 대화 끝에 거의 반쯤 확신한 가설을 세워 놓고서도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되물었다. 이 총탄은 사람을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은 어떤 것에 대한 '조건'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것이 아니라면?
기실 본능적인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선 연 역시 인간이다. 죽음의 가능성이 무섭지 않을 리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있었기에 연은 그 쪽을 선택했다. 차라리 죽음에 대한 공포는 한 번 정도, 어쩌면 그것 이상으로 그녀가 경험해봤던 것이었으므로.
발걸음은 금방이었다. 202호라는 팻말이 달린 문 앞에 선 연이 멈춰선다.
몇 번 숨을 꾹 들이삼켰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쉬운 일이다. 단순한 실험일 뿐인. 부정적인 것보다 희망적인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의도적으로 되뇌이며 표정을 지운다. 그건 습관이었다. 죽은 쥐가 사물함에 들어 있거나, 머리채를 잡히거나, 혹은 책상 위에 쏟아진 썩은 우유를 볼 때에 그녀가 종종 짓곤 했던. 최악으로 치닫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어 같은 것들을 머릿 속으로 생각한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언젠가의 선 연이라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고 잡을 것 하나 없었던 순간의. 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선 연이 문을 밀어 젖혔다. 해야 할 일은 쉬울 것이다. 문을 열면 조각상이 보일 것이다. 조각상을 지나치고, 오래된 캐비넷을 찾자. 왼쪽의 캐비넷에서 총탄을 찾고, 문양을 확인하고... 그리고 제게로 쏘면 된다. 그리고 안전하다면, 그걸 아이들에게 말해주면 된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할 수 있을 법한 쉬운 일이다.
때문에 더욱이 선연은 자신이 그것을 하고자 했다.
대체 이 불확신에 대한 공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하여.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타인을 마주쳤다는 사실이었다. 잔뜩 땀에 젖어 헐떡이는, 한 편으론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향해 물었다. 문양, 봤어? 지나치게 무미건조했던가. 잠시 생각했으나 그 사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평소라면 먼저 달려가 걱정을 했겠지만, 지금은, 연이 숨을 들이삼켰다.
그럴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본능적인 직감이 소곤거린다.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느 한 면으로는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을 하자. 연은 머릿속의 말에 따른다.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아마 이야기가 아닌 질타가 될 것 같지만. 쓸데없는 말들은 삼켜버렸다. 반쯤 마비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제대로 된 생각이 들어차지 않았다. 그나마 그 순간 떠올린 최대한의 배려라는 것은 고작 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뒤돌아서는 것 정도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태연스럽게 탄창을 분리한다. 어딘가 비어버린 속이 차갑게 내려앉는다. 문양을 확인하지 않은 채 탄환을 하나 채워넣는다.
아주 별 것 아닌 것처럼, 연은 총구를 제 머리에 가져다 댔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건 금방 끝날 것이다. 아주 금방 끝날 것이다. 그 어느 날들의 기억들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한다. 방아쇠에 감긴 손가락이 바르르 떨었다. 언젠가 목이 졸리던 감각을 떠올린다. 변기물 속에 처박혀 숨을 쉴 수 없던 순간, 낄낄거리던 목소리들과, 도와주지 않던 사람들과, 학생들과, 선생님과.... ... 세상에서 혼자 남은 것 같았던 그 한 순간과.
아, 정말 죽고 말 거라고 생각했던.
'탕'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깨닫는 순간 한껏 목을 졸랐던 긴장감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어쩐지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허망함일까? 아니면 안도일까.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주저앉을까, 한 순간 세은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은 손이 제 손을 꽉 잡고 달리는 게 느껴졌다. 그 조급한 뜀박질에 끌려 좇으며, 연은 어렴풋하게 비현실감을 느낀다.
저지르고 나니 허무할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가련한 그 어떤 날의 기억만이 남아 뱀처럼 온 몸을 칭칭 휘어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