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핸드폰을 내 입맛대로 개조하는 정도는 할 수 있죠~? 물론 패스워드 풀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쯤은 그냥 누워서 떡 먹는 수준이다. 해영은 딜레마가 냉큼 내미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주머니의 USB 케이블로 핸드폰과 핸드폰을 연결하는 손길은 망설임 없이 신속하고 빨랐다. 반쯤은 답답하고 가여운 중생 하나를 계몽시키는 마음이었지만 솔직히 이건 반쯤은 재미다. 그러니까, 가벼운 장난같은 느낌이라고 해두는 편이 좀더 정확하겠지.
어쨌거나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 핸드폰에 깔려 있는 크래킹 툴을 실행시키며 해영은 곰곰히 고민에 빠졌다. 어나니머스를 신봉하는 멍청이에게 자신이 그 집단에 속해있다는 걸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지도 모르지. 이런 식으로 손쉽게 흔들리는 부류를 마주하는 것에 해영은 익숙했다. 그것은 아마도 일전 해영 자신이 그러한 부류에 속해 있었고 지금은 그 흔들림을 조장하는 그 어떤 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건, 솔직히 꽤 재밌고,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 그저 아주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한다면.
자극해 봐야 좋을 것이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딜레마의 속을 긁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물론 그 근거 자체는 철저히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알고 있는 해영의 입장에서 딜레마의 말은 정말로 순진해 빠진 소리였다는 뜻이다. 어떠한 공신력도 심지어 가입하기 위한 절차조차 하나 없는 집단이 어나니머스다. 그 말인즉슨, 누구도 자신을 어나니머스라고 칭할 수 있거나, 혹은 손바닥 바꾸듯 어나니머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말은 다시 바꾸어 말하자면, 익명 뒤에 숨어 개소리와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난무할 수도 있다는 뜻이고..... 하하. 아무렴 어때. 중요한 건 지금 이 사람한테 보여주는 일이겠지. 해영은 어느 새 패스워드가 풀린 핸드폰을 적당히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뭘 한다~ 어차피 특별히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오랜만에 옛 취미라도 살려서 홈 화면에 탈라리온이라도 그려둘까. 어릴 적 기억의 어느 한 부분을 꺼내들었다가 해영은 이내 그만두었다. 이 나이 먹고 굳이 흑역사를 하나 더 적립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성능 좋을 정도면 되겠지. 정크 파일을 없애고 멋들어지게 정리 해주는 정도면 이 도련님은 휙 넘어가고 말 거란 걸 해영은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많은 - 스마트폰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 일반인들이 보이는 반응이 그랬으므로. 거기다가 딜레마 본인이 요구한 해킹은, 흠. 이미 충분히 증명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얄팍한 보안을 뚫은 해영이 가장 먼저 털어버린 게,
"그래서, 흠. 멋진 이름이네요~ 애들린 맥밀란."
딜레마의 신상정보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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